동천왕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

 

안녕하세요, 오늘은 244년 고구려 동천왕때, 이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았는데요.

이 사건에 관하여 간략하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2세기 전반에는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복잡했는데요,

중국에서 위나라가 북중국을 차지하자 동천왕은 242년 오나라와 교류하여 먼저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낙랑군과 중국 본토의 교통을 차단려는 목적이었지만,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반경하여 수도인 환도성 마처 함락되었다. 이후 동천왕은 남옥저로 달아 난다.

 

 

 

위나라 관구검의 장군의 침입으로 수도마저 빼앗겨 버린 상황이 되었지만, 동천왕의 기습으로 다시금 승리를 거두며 환도성을 되찾게 되지만, 관구검의 또 다시 위나라 관구검은 환도성을 약달한 뒤 불내성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돌아간다. "불내성"은 견디지 못하는 성이라는 뜻이다.

 

 

012

 

 

한나라의 수도의 환도성을 수차례 침입했던 관구검은 삼국사기, 고구려조등에서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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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무령왕릉

 

 

 

안녕하세요..^^

오늘은 역사이야기를 해보려고해요

무령왕릉 많이 들어보셨을꺼에요

무령왕릉하면 백제의 공예품들인데요

 

우리나라 문화라 너무 멋있는거 같아요

 

그럼 무령왕릉에 대해서 간단히 볼께요

 

1. 무령왕릉

 

525년에 축조된 공주 송산리 무령왕 무덤은

 

한강유역의 돌무지 무덤이나 공주. 부여지방의 횡혈식

 

석실분과는 달리, 남조의 영향을 받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 전축분이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석수, 금관, 동자상, 청동경, 자기,

 

지석 등을 통해서 백제의 국가상, 사회 생활상,

 

중국과의 문화 교류, 삼국문화의

 

 

0123

 

특수성과 공통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금관장식은 우수한 백제 공예품을

 

볼수 있게 한다.

 

간단하게 무령왕릉에 대해서

알아보았어요^^

원하시는 정보 얻으셨길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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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서경천도운동

 

 

 

안녕하세요..^^

오늘은 역사 이야기로 묘쳥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해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하면 생각나는건 바로

민족적 기상이라고 해야 하나 ㅎㅎ

간단하게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야기 한번 해볼께요

 

1.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금의 압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났다.

서경출신의 신진관료 정지상과 승려 묘청,일관 백수한 등 서경파는

서경천도를 통해 개경의 문벌귀족을 누르고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자 하였다.

 

 

이들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경의 지덕이 이미

쇠하였다는 풍수도참설과 칭제건원, 금국 정벌론을 표면에 내세웠다.

인종은 이들의 주장에 마음이 움직여 1128년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자주 행차하였다.

 

서경천도가 추진되자, 김부식등 개경귀족들의 반대운동도 격렬해져 갔다.

이에 묘청은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고, 1135년에 나라 이름을 대위,

연호를 천개, 군대를 천견추의군이라 하고 난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김부식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토벌에 나섰다.

그는 먼저 개경에서 묘청파의 정지상, 백수한 등을 처단하고

평양으로 진격하니, 서경 반란군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012

조광이 묘청을 죽이고, 조광은 1년만에 평정되었다.

이 운동은 자주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기상의 표출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았는데요

원하시는 정보를 얻으셨나요?

건강 관리 잘하시고 좋은일만 생기길바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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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의 명인 백결선생

 

 

 

 

 

안녕하세요..^^

오늘은 간단하게 신라의 백결선생에 대해서 한번 간단하게 알아 볼께요

백결선생하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을꺼라 생각해요

하지만 간단하게 백결선생 요약을 해보도록 할께요

 

1. 백결선생

경주 낭산 기슭에 살았는데,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옷을 백군데나 기워 입었다고 해서 백결선생이라 이름하였다.

거문고의 명인으로 사람의 모든 희로애락을 거문고로 풀었다 한다.

어느 해 세모에 집집마다 울려나오는데 떡방아 소리를 듣고, 부인이 "우리는 무엇으로 새해를 보냅니까"라고 근심하자,

거문고로 방앗공이 소리를 내어 아내를 위로하엿는데, 그 곡조가 바로 방아타령이다.

 

간단히..

백결선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요. 백결선생하면 거문고라고는 생각했는데요

방아타령의 곡조를 창시했다는것 아셨나요?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백결선생의 거문고로 소박하지만 맛있는 삶을 살았던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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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비우고 성을 지킨 을지문덕

 

 

 

 

고구려가 강성한 나라로 발전하고 있을 때, 중국은 남북에 열 나라가 있어 서로 다투고 있었다. 6세기 말엽 북주라는 나라에서 활동하던 양견이 수나라르 세웠는데, 그는 북쪽의 여러 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양자강 이남의 나라들도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양견은 중국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의 초고 통치자임을 자처하면서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그 어떤 독자적인 세력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곧 동방 강대국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을지문덕 휘하의 고구려군은 수군의 절대 다수가 전투 경험이 없다는 점, 엄청난 대군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지휘 체계의 통일성과기동성이 떨어지는 점, 후방 보급로가 멀고 험하므로 보급에 난관이 있으리라는 점 등의 수군 내부의 약점과 제1차 전쟁 때의 승리 겸험에 기초해 자신의 잔략과 전술을 수립하였다.

고구려군은 요하 유역의 방어 진지들을 강화하는 한편, 적의 속전 속결 전략을 장기 방어 전략으로격파하고 전의 역량을 분산시키고 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요하를 넘어 집요하게 고구려의 서쪽 관문인 요동성을 공격하는 침략군을 고구려 군민들은 용감히 막아 냈다.

 

 

 

 

그러자 수군을 고구려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수십만의 군대로 요동성을 포위하고 계속 공격을 했지만, 요동성을 끄덕도 하지 않았다.

육균의 요동성 공격, 해군의 평양성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수 양제는 우중문, 우문술을 지휘관으로 삼고 9개 군단 30만의 별동대를 조직하여 고구려의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다. 이에 을지문덕은 청야수성 전술(들을 비우고 성을 지킨다-적이 통과하는 지역의 식량,가축, 말 먹이 등 전략 물자들을 치워 적이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성을 굳게 방비하여 지키는 전술을 말한다)과 유인 전술로 대응하였다. 전술과 전략에 뛰어났던 을지문덕과 살수대첩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수나라군이 압록강에 자리잡자 고구려 진중에서는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왕은 전략이 뛰어난 을지문덕을 청하여서, "그대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기백을 엿보고 올 수 있는가?" 라고 물었다.

"네. 소신에게 한 가지 꾀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부로서 취할 길이 아니라 할지 모르나, 싸움은 어디까지나 전략이 으뜸이니 취하여 두려울 바 없으리라고 생각하옵니다. 더구나 국가의존망을 건 마당에 다시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어떤 꾀인가?"

"거짓으로 투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그 군세와 군진의 허실을 엿보고 오는 것입니다."

을지문덕의 전략을 들은 왕은 곧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을지문덕은 적장에게 협상을 제안하고 대담하게 단신으로적진에 들어갔다.

 

 

 

 

적진에서 직접 그들의 식량 부족과 사기 저하, 그리고 지휘 계통의 혼란을 목격한 을지문덕은 그들과 맞서 싸울까 하였으나 적군이 피로하여 지쳐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더욱더 피로하게 하여 완전히 지쳤을 때 한꺼번에 섬멸하자는 전술을 세웠다.

그래서 을지문덕은 적군을 맞아 싸울 때마다 싸우는 척하다가는 패하는 척 달아나곤 하였다.

결국 수나라 군사들은 하루에 7번 싸워서 7번 모두 승리하게 되었다. 승리에 취해 지친 전군은 점점 군량의 집결지가 멀어지는 것도 모르고 고구려군을 추격하여 살수까지 건너게 되었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다.

 

 

 

 

     귀신 같은 책략으로 천문을 연구하고

     기묘한 계산으로 지를 통달하였도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아서 그치기를 바라노라.

 

 

 

비로서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은 우중문은 서둘러 총 퇴각을 명령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요소요소에 매복해 있던 고구려군은 사면에서 공격을 가하였고 어지러이 도망치던 수군은 살수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궤멸하고 말았다.

별동대30만중 살아서 돌아간자가 2700명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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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는 고조선의 동북부인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을 무대로 발전한 나라이다. 고조선 멸망 뒤 이지역에는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이 설치되었으나, 30여 년 만인 기원전 75년경에 이 지방 세력들에 의해 만주로 쫓겨갔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 건국이 이루어지기 전인 기원전 4세기경부터 "예맥"이라고 불리던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기원전 40년경에 이르러 고구려라는 단일 세력으로 통합되었다.

다음에 소개된 주몽설화는 바로 이 시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소국들을 병합하고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고구려의 건국설화이다.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옮겨간 뒤 세상을 떠나고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저는 하백의 딸로 유화라고 합니다. 아우들과 놀고 있을 때 한남자가 나타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저를 웅신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해놓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았습니다. 부모는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으며 저를 이리로 귀양보냈습니다."

이상히 여긴 금와왕이 그녀를 방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소을 비추었다. 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닷 되만 한 알을 한개 낳았다.

왕이 알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았고, 길에 내다버리자 소나 말이 피해 지나갔다. 들에 내다버리니 새와 짐승들이 그를 덮어주었다.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아, 도로 그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유화가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했다. 일곱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주몽이라 이름지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이 일곱 있었다. 언제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모했다. 장남 대소가 왕에게 고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니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좋은 말을 알아본 주몽은 좋은 말에게는 일부러 먹이를 적게 주고 나쁜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했다. 왕은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유화는 왕의 아들들이 자신의 아들인 주몽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주몽에게 일렀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그러니 빨리 여기를 떠나라."

주몽은 오이 등 세사람과 함께 도망, 쫓기다가 엄수라는 물가에 이르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다. 뒤쫓는 자들이 곧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올라와 다리를 만들어 일행을 무사히 건너게 한 다음 흩어졌다.

주몽이 졸본주에 이르자 이곳을 도읍으로삼았다.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위에 집을 지어 거처하며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씨로 성을 삼았다.

 

 

 

고구려의 건국설화는 부여의 건국설화와 비슷한데, 현재 [삼국사기],[삼국유사],[광개토왕비문]등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들이 설화인 만큼 신비로운 사실들이 많아 역사적 사실로 모두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지배세력이 부여족 계통이었으며, 동가강 유역을 무대로 발전했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주변세력들을 계속 통합하여 기원후 3년경인 유리왕때 졸본에서 압록강변 통구의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통합된 세력은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5개 집단이었으며, 그 통합은 대개 "나"를 중심으로 한 연맹적인 성격을 딘 것이었다.

"나"는 냇가나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집단이다. 그 성격은 부족집단이나 일부 초기의 국가 같은 형태였을 것이다. 이들 "나" 집단은 늦어도 기원전 2세기까지는 연맹체를 형성했으며, 그 무렵에 이미 고구려란 이름은 존재하고 있었다.

중앙의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 이들 연맹체들은 방위에 따라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등의 5부체제로 고구려의 지배체제에 흡수되었다. 5부체제는 고구려의 국가형성 초기에 존재한 지배자공통체였다. 고구려는 이를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어나갔다. 고구려는 태조왕 때 옥저를 정복했고, 통치제도의 정비와 왕권강화의 토대를 계속해서 다져나갔다. 고국천왕때에 이르러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제로 바뀔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것도 이를 배경으로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광개토왕과 장수왕때는 중국와 어깨를 겨루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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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

역사'story 2013. 11. 16. 15:08

강화도조약

 

 

 

 

1876년 2월 26일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과 일본의 특병전권대신 구로다가 강화부연무당에서 모두 2개 조항에 이르는 조약문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일본은 조선침탈의 문을 열었다.

이날은 한.일 양국의 근현대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날이었다. 조선왕조는 강화도조약 이후 제국주의의 침략 목표물로전락하여 하나둘씩 가진 것을 빼앗기다가 끝내는 나라까지 빼앗긴 데 비해, 일본은 이 조약을 계기로 세계열강의 하나로 더오르면서 패전국이 되는 1945년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강화도조약은 명목상으로 우리나라가 중세국가에서 벗어나 세계근대사에 일국으로 당당히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그전까지 조선은 청나라의속국이었지만 이 조약으로 청나라와 평등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말뿐이었고 실질적으로 이 조약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전혀 방어할 수 없도록 하는 극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3개월 항구 개항을 통해 침략무역이 가능해졌고, 조선 내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탈법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이 조약 체결을 계기로 이후 미국.영국.러시아 등 다른나라 들의 무리한 요구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위해 주도면밀한 준비를 해왔다. 1854년 미국으로부터 개항을 강요당한 뒤 메이지 유신으로 자발적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이때 쌓은 힘을 첫번째로 조선에 실험 적용해본 것이다.

방법은 미국에서 배운 그대로 무력도발이었다. 1875년 5월 일본은 200톤짜리 목조선 운양호 등 군함3척을 해안측량이라는 미명하에 부산앞바다로 파견하여 훈련이라는 구실로 함포를 쏘았다. 1차 도발에 이어 일본은 9월 19일 다시 운양호를 인천 월미도 앞바다로 보내어 수심을 측량한다는 구실로 강화도요새 앞으로 바싹 접근학끔 했다. 우리측 수비대가 정지경고로 발포하자, 운양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강화요새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다음날에는 성채를 점령한 후 무차별 살육을 벌였다. 이른바 "운양호사건"의 결과는 실로 비극적이었으니,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을 낸 데 반해 일본군은 단 2명의 경사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런 만큼 이 사건의 마무리를 위해 마련한 "강화부담판"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이듬해 2월 11일 첫 회의 이후 일본측은 협박과 공갈로 우리측을 공박하며 결국 자신들의초안을 그대로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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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14개조 정강

 

왼쪽부터 박영효, 성광범, 서재필, 김옥균

 

 

1. 갑신정변의 원인

갑신정변은 1880년대 초 개화당은 그들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정치적 비상계획으로서 자금을 어드려는 차관운동을 벌였으나 일본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하여 잠시 후퇴하였으나 임오군란 이후 청국 세력을 배제하고 수구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정변을 구체적으로 모의하게 되었다. 개화당은 세재필 등을 행동대로 포섭하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다짐 받은 다음 거사를 최종 결심하였다. 김옥균, 박영효가 이끈 개화당은 일본군이 출동한다는 약속 아래,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낙성식(1884. 10. 17.)을 기하여 쿠데타 를 단행 하였다. 곧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지만 일본의 배반과 청군의 개입으로 혁명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성조약이 체결되었고 외세의 내정간섭을 더 한층 불러 일으켰다.

 

 

 

우정국 총판

 

 

2. 갑신정변의 결과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500년 동안 내려오던 봉건적 지배체제를 근대적 정치체제로 개혁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민중에게 기반을 두지 못하고 소수의 선각자에 의한 위로부터는 혁명, 그것도 외세에 의존하여 실현시려는 구태의연한 거사 방법이 성공할 리 없다는 점에서 아쉽다. 

 

 

 

 

3. 갑신정변 14개조 정강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저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 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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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일생이다.

 

15세기 후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로 근대 천문학의 포문을 열고 자연과학의 새시대를 예고 했다. 중세의 악흑기를 빠져나온 자연과학과 철학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01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주를 탐구했다. 기원전 6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구의 운동 가능성을 제기 했으나 당신의 여건으로는 그 주장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를 부동의 존재로 인식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의 사상을 발전시켜 천문학 집대성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는 부동의 존재이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아르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관점은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일부 내용과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한 이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학설이 중세 기독교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므로 한 단계 더 발전한 '천동설'로 확립되어 유럽 사회에서 불변의 진리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크게 발전하고 천문관측의 정확도가 높아지면서 천동설이 모순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비스와 강변에 있는 토룬에서 출생했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부친은 그가 열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코페르니쿠스는 로마 천주교의 대주교였던 숙부의 손에서 자랐다.

열 여덟 살에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천문학에 심취했고, 3년후 르네상스 운동의 발원지인 이탈리아로 건너가 볼로냐 대학과 파도바 대학에서 법률, 의학, 신학 등을 공부했다. 이시기에 그는 '천동설' 이론에 조금씩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기독교 신학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반박하는 자유로운 사상과 과학적 사고는 종교의 속박을 받았다. 이에 코페르니쿠스는 플라우엔부르크에 작은 천문대를 짓고 그곳에서 30년 동안 남몰래 천체를 관측했다. 그 결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탄생한 것이다.

 

1514년에 자신의 이론을 담은 소책자를 발간 했으나, 주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데 그쳤다.

그의 친구들이 교회 고위 성직자들에게 그 이론을 적극적으로 소개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60세가 될 때까지도 자신의 학설을 당당하게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1533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일련의 강연에서 "태양 중심설"의 주요 이론을 발표했다. 교회가 그런 자신의 행보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코페르니쿠스는 70세가 되던 해에 비로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자신의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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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주변을 회전하는 한 행성에 불과하며, 자전한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또 우주의 중심은 바로 태양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가 주장한 "태양 중심설"은 엄밀히 말해서 정확한 학설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신학의 우주관에 도전한 그의 학설은 천문학과 자연과하그이 발달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한 것임에 틀림없다. 코페르니쿠스는 근데 천문학의 포문을 열고 자연과학의 새 시대를 예고 했다. 중세의 암흑기를 빠져나온 자연과학과 철학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그의 인생에 30년이 넘는 연구끝에 깨달은 새로운 과학의 진리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 받치 위대한 인물로 내 마음에 정신적 멘토로 확 들어왔다. 그의 사상과 정신을 본받아 그 어떠한 세상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은 정신을 소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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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현이네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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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10월 혁명 원인과 배경

 

 

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되었던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국력을 많이 허비했다. 공업 경제가 파탄 나고 실업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굶주림에 지친 민중의 불만은 점점 높아만 갔고 내부 갈등도 심화 되었다. 1917년에 결국 분노에 찬 민중이 봉기하면서 2월 혁명이 발생했고, 니콜라스 2세는 단8일 만에 실각하고 말았다.

혁명 기간에 러시아의 무산 계급은 그들만의정권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그런 한편 자본가 계급도 정권 구도에서 밀리 않으려 소비에트 공산주의자 일부를 회유해서 임시 정부를 발족하고 정부 기관을 구성했다. 두계급의 정권 투쟁이 치열해지면서 갈등은 더욱 심회되었다. 당소 소비에트 정권은 온건 혁신파인 멘셔비키 당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은 노동자 계급이 전권을 손에 쥐는데 반대했다.

노동자 계끕의리더 레닌이 유배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멘셰비키와 자본가 계급이 서로 결탁하면서 임시 정부가 소비에트 정권을 압도하게 되었다. 임시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만 물러나야 한다는 국내의 반전 분위기를 무시한 채 전쟁을 지속하는 한편 국내 혁명의 불씨를 끄기 위해 애썼다. 소비에트 정권은 금방이라도 임시 정부에 밀려날 것만 같은 위기를 맞이 했다. 바로 이때 유배 중이던 레닌이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로 돌아왔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은 반드시 무산 계급이 주도 하는 혁명이 되어야 하는 혁명을 일으킨 후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립해야 한다는 내용의 '4월 테제'를 발표했다.

7월,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노에 찬 민중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행진을 했다.

그들은 임시 정부가 정권을 다시 소비에트 정부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오히려 대규모 군경을 동원해 시위하는 민중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정부를 해산시키고 레닌을 비롯한 소비에트인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을 "러시아7월 봉기" 라고 부른다.

 

레닌 러시아 10월의혁명 연설장면

 

임시 정부가 7월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하자 혁명 세력은 지하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에 당 대표 대회를 열어 무장 보기를 결의했다. 그해 9월, 자본가 계급이 군사 독재를 감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볼셰비키 당(소비에트 정부이자 지하 혁명 세력)은 이를 진압하고 혁명의 기세를 높이기 시작했다. 러시아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지고, 군대는 명령에 불복종하고 제멋대로 행동했으며, 농촌에서는 식량을 강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마침내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25일), 레닌이직접 혁명을 주도했다. 단 몇시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량, 기차역, 전신국, 은행, 정부 기관등을 장악하고 저녁 9시40분경 임시 정부의 마지막 보루였던 동궁(에르미타주)를 포위했다. 이로써 러시아 정권은 다시 소비에트 정부가 장악했다.

다음날 아침8시경, 마침내 동궁이 혁명군에 함락되고 자본가 계급이 세운 임시 정부는 와해되었다.

이날 저녁 레닌을 수장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부가 발족되었고 혁명의 물결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 되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성공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했다.

 

 

러시아 10월의혁명 정의

1917년 10월 1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레닌

1870년 4월 22일에 러시아 볼가강 연안에 있는 심비르스크에서 출생한 레닌은 본명이 블라디미르일리치울리야노프 이다. 러시아 혁명을 추진하면서 이름을 레닌으로 개명했다. 1887년에 마르크스 주위자가 되어 자본론을 연구했고, 189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후 무산 계급 혁명당을 창설하여 이를 이끄는 등 본격적으로 러시아10월의 혁명에 가담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무장 간섭과 국내 반란을진압하고 마침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탄생시켰다. 또한 사회주의 체제에 적합한 경제, 외교 정책을 수립해 정권을 안정시키고 코민테른을 창시해 전 계적으로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년54세

 

러시아 10월의 혁명은 1917년 레닌을 통해 이루워진 러시아 10월의 혁명이 성공하여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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