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일생이다.

 

15세기 후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로 근대 천문학의 포문을 열고 자연과학의 새시대를 예고 했다. 중세의 악흑기를 빠져나온 자연과학과 철학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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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주를 탐구했다. 기원전 6세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구의 운동 가능성을 제기 했으나 당신의 여건으로는 그 주장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를 부동의 존재로 인식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의 사상을 발전시켜 천문학 집대성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는 부동의 존재이며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아르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관점은 기독교의 성경에 나오는 일부 내용과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한 이후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학설이 중세 기독교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므로 한 단계 더 발전한 '천동설'로 확립되어 유럽 사회에서 불변의 진리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크게 발전하고 천문관측의 정확도가 높아지면서 천동설이 모순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비스와 강변에 있는 토룬에서 출생했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부친은 그가 열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코페르니쿠스는 로마 천주교의 대주교였던 숙부의 손에서 자랐다.

열 여덟 살에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천문학에 심취했고, 3년후 르네상스 운동의 발원지인 이탈리아로 건너가 볼로냐 대학과 파도바 대학에서 법률, 의학, 신학 등을 공부했다. 이시기에 그는 '천동설' 이론에 조금씩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기독교 신학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반박하는 자유로운 사상과 과학적 사고는 종교의 속박을 받았다. 이에 코페르니쿠스는 플라우엔부르크에 작은 천문대를 짓고 그곳에서 30년 동안 남몰래 천체를 관측했다. 그 결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탄생한 것이다.

 

1514년에 자신의 이론을 담은 소책자를 발간 했으나, 주변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데 그쳤다.

그의 친구들이 교회 고위 성직자들에게 그 이론을 적극적으로 소개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60세가 될 때까지도 자신의 학설을 당당하게 발표하지 못했다. 그러나 1533년에 로마에서 개최된 일련의 강연에서 "태양 중심설"의 주요 이론을 발표했다. 교회가 그런 자신의 행보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코페르니쿠스는 70세가 되던 해에 비로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자신의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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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의 주변을 회전하는 한 행성에 불과하며, 자전한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또 우주의 중심은 바로 태양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가 주장한 "태양 중심설"은 엄밀히 말해서 정확한 학설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신학의 우주관에 도전한 그의 학설은 천문학과 자연과하그이 발달에 획기적인 전환기를 마련한 것임에 틀림없다. 코페르니쿠스는 근데 천문학의 포문을 열고 자연과학의 새 시대를 예고 했다. 중세의 암흑기를 빠져나온 자연과학과 철학은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그의 인생에 30년이 넘는 연구끝에 깨달은 새로운 과학의 진리를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 받치 위대한 인물로 내 마음에 정신적 멘토로 확 들어왔다. 그의 사상과 정신을 본받아 그 어떠한 세상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은 정신을 소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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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현이네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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