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주몽,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고구려는 고조선의 동북부인 압록강 중류 동가강 유역을 무대로 발전한 나라이다. 고조선 멸망 뒤 이지역에는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이 설치되었으나, 30여 년 만인 기원전 75년경에 이 지방 세력들에 의해 만주로 쫓겨갔다.
이 지역에는 고구려 건국이 이루어지기 전인 기원전 4세기경부터 "예맥"이라고 불리던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기원전 40년경에 이르러 고구려라는 단일 세력으로 통합되었다.
다음에 소개된 주몽설화는 바로 이 시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소국들을 병합하고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고구려의 건국설화이다.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옮겨간 뒤 세상을 떠나고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저는 하백의 딸로 유화라고 합니다. 아우들과 놀고 있을 때 한남자가 나타나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저를 웅신산 밑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정을 통해놓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았습니다. 부모는 중매도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으며 저를 이리로 귀양보냈습니다."
이상히 여긴 금와왕이 그녀를 방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방 소을 비추었다. 몸을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닷 되만 한 알을 한개 낳았다.
왕이 알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았고, 길에 내다버리자 소나 말이 피해 지나갔다. 들에 내다버리니 새와 짐승들이 그를 덮어주었다.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아, 도로 그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유화가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골격과 외양이 영특하고 기이했다. 일곱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주몽이라 이름지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이 일곱 있었다. 언제나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주몽을 따르지 모했다. 장남 대소가 왕에게 고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니일찍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했다. 좋은 말을 알아본 주몽은 좋은 말에게는 일부러 먹이를 적게 주고 나쁜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했다. 왕은 여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유화는 왕의 아들들이 자신의 아들인 주몽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주몽에게 일렀다. "지금 나라 안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 하니,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그러니 빨리 여기를 떠나라."
주몽은 오이 등 세사람과 함께 도망, 쫓기다가 엄수라는 물가에 이르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손자다. 뒤쫓는 자들이 곧 따라오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올라와 다리를 만들어 일행을 무사히 건너게 한 다음 흩어졌다.
주몽이 졸본주에 이르자 이곳을 도읍으로삼았다.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 위에 집을 지어 거처하며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씨로 성을 삼았다.
고구려의 건국설화는 부여의 건국설화와 비슷한데, 현재 [삼국사기],[삼국유사],[광개토왕비문]등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내용들이 설화인 만큼 신비로운 사실들이 많아 역사적 사실로 모두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 지배세력이 부여족 계통이었으며, 동가강 유역을 무대로 발전했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주변세력들을 계속 통합하여 기원후 3년경인 유리왕때 졸본에서 압록강변 통구의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통합된 세력은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5개 집단이었으며, 그 통합은 대개 "나"를 중심으로 한 연맹적인 성격을 딘 것이었다.
"나"는 냇가나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집단이다. 그 성격은 부족집단이나 일부 초기의 국가 같은 형태였을 것이다. 이들 "나" 집단은 늦어도 기원전 2세기까지는 연맹체를 형성했으며, 그 무렵에 이미 고구려란 이름은 존재하고 있었다.
중앙의 계루부를 중심으로 한 이들 연맹체들은 방위에 따라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등의 5부체제로 고구려의 지배체제에 흡수되었다. 5부체제는 고구려의 국가형성 초기에 존재한 지배자공통체였다. 고구려는 이를 통해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어나갔다. 고구려는 태조왕 때 옥저를 정복했고, 통치제도의 정비와 왕권강화의 토대를 계속해서 다져나갔다. 고국천왕때에 이르러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제로 바뀔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것도 이를 배경으로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광개토왕과 장수왕때는 중국와 어깨를 겨루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