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김삿갓 유적지 탐방
영월 김삿갓 유적지 탐방
김삿갓 유적이 있는 강원도 영월은 원래 단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죠. 단종의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고 유배되어 머물러던 청려포와 관풍헌, 그리고 무덤인 장릉이 있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영월을 찾는데요.
이렇게 영월을 찾는 사람들 속내를 보면 수백년전, 소년 임금의 슬픈 역사를 생각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강이 휘감아 도는 영월의 산자수려한 풍광을 즐기기 위한 마음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아름다운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비극을 들여다 보는 일은 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데요 그감흥을 또 한번 느끼게 되는 곳이 바로 김삿갓 유적지 인거 같아요
영월읍에서 한강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단양 쪽으로 가다 보면 고씨동굴을 지나게 되는데요 거기서 한참을 더 가 한강을 건넌 다음 단양으로 가기 직전에 태백 방향으로 빠지면 김삿갓 유적 표지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아름다운 계곡 길을 따라가면 김삿가 유적지가 나와요
김삿갓 문학관
사실 이곳은 1982년 전까지만 해도 물좋은 계곡 정도로만 알려져 몇몇 사람들이 여름 피서를 오던 한적한 곳이였다는데요 그런데 이지역 역사를 연구하던 박영국 선생이 계곡이 시작하는 노루목에 있는 무덤의주인이 김삿갓임을 알아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하네요. 그러나 김삿갓이 유명한 줄만 알지 그에게 어떤 내력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심심한 여행지일 뿐일꺼 같더라구
김삿갓 문학관 내부
그래서 이러한 여행자들을 돕기 위해 나중에 김삿갓 문화관과 여러개의 시비가 들어서면서 김삿갓 유적지란 이름도 부를 정도가 되었는데요. 지금도 김삿갓, 곧 난고 김병연의 일생과 시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한낱 산골의 작은 공원에 불과한 곳일 수 있습니다.
김삿갓 문학관 내부 "내삿갓"
김병연의 방랑 인생과 그의 가계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깊은 산골이어야 이해가 되는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김삿갓 유적지에 도착하면 처음 들리는 곳이 김삿갓 문학관인데요. 사실 무덤을 보기 전에 문학관에 있는 여러 전시물을 둘러보며 김삿갓에 대해 예비 지식을 쌓는 것도 좋을거 같더라구요
김삿갓 문학관 내부 "길주명천"
김삿삿은 일반적인 한시도 많이 섰지만 한자를 풀어서 쓰는 파자나 한글의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파격을 즐기기도 했는데요
무엇보다 겉멋과 형식에 찌든 당시의 시풍에서 벗어나 세상 사람들의 어려운 삶과 지배층의 가식에 대한 풍자,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시에 담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합니다. 문학관을 둘러본 뒤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김삿갓 무덤으로 오르는 길이 나오는데요.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 마대산 방향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약 2km정도 가면 김삿갓 가족이 살았다고 하는 곳이 나오는데요.
복원된 김삿갓의 생가
이집은 2002년에 복원한 작은 집과 집과 사당은 원래 강원도 산골에 있던 집보다는 단아하게 꾸몄다고 합니다.
김삿갓의 어머니가 양반댁 여인임을 고려한 까닭입니다.
김삿갓의 무덤
김삿갓의 무덤도 처음 발견되었을 때 보다 많이 화려해졌다 합니다. 계곡 오른쪽에 덩그러니 높여 있던 봉분 곁에 그럴듯한 묘비가 묻힌 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는데 무덤에 이르는 길도 여러 개의 기념물로 가득하며, 김삿갓의 시를 적어 놓은 비는 물론 김삿갓의 일생을 상징하는 조각도 여럿 있습니다.
김삿갓의 유명세가 대단한 까닭인지 영월군은 원래 하동면이었던 이 일대 행정구역명을 김삿갓면으로 바꾸었다네요.
당연 와석계곡도 김삿갓계곡이 되었네요
김삿갓의 유래
김병연은 조선 후기 명문 가문인 안동 김씨로 태어났지만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죄로 폐족이 된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할아버지를 욕하는 글을 쓴 김삿갓은 평생 하늘을 볼 수 없다고 해 삿갓을 쓰고 다녔다. 그래서 본래 이름인 김병연 보다 김삿갓으로 더 알려지게 된것이다. 김병연은 평생을 떠돌아다니다 전남 화순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삿갓의 할아버지를 욕한 글
영월에 잠든 방랑 시인 김삿갓
김병연(1807~1863)은 조선후기, 우리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詩)로 세상을 울리고 웃긴 시인 김삿갓이다. 김병연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또 묻혀 있는 곳이 바로 영월이다. 우리에게 김삿갓으로더 친숙한 김병연은 어린 시절부터 글재주가 보통은 넘었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형과 함께 살던 그는 어느 날 영월 읍내에서 백일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가해 장원이 되었다. 비록 사연이 있어 두 아들과 숨어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로서도 기쁜일이 아니였겠는가. 하지만 백일장 시제를 보고 어머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가산의 정공이 죽음으로 충절을 지켰음을 찬양하고 적에게 항복해 죄가 하늘에 이른 역적 김익순을 공박하라는 내용이었다. 김익순은 바로 김병연(김삿갓)의 친할아버지다. 선천 부사였던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가산 군수 정시가 홍경래를 욕하며 죽으면서까지 관인을 넘겨주지 않은 것과 달리 스스로 몸을 묶은 뒤 항복했다. 나중에 정부군에 의해 홍경래이 난이 진압되려고 하자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것이 겁이 난 김익순은 이번에는 반란군 우두머리 가운데 한명인 김창시의 목을 1천냥에 샀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바람에 모든 내용이 들통나고 말았다.
이죄로 김익순의 가문은 멸족의 위험에 빠졌다. 다행히 어린 병연과 형은 종이었던 김성수의 도움으로 겨우 몸을 피했으나,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고 멸족에서 폐족으로 감형되면서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영월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김병연은 크게 상심하고 스스로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죄인이라 여겨 스무 살 무렵부터 처와 자식을 고향에 남겨 두고 홀로 삿갓을 쓰고 방랑길을 떠났다. 그는 고향에 잠시 돌아온 적이 있지만 평생 객지 생활을 하다가 전라남도 화순 동복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중에 둘째 아들 익균이 영월에 유해를 수습해 묻었다.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이 난이 없었다면 김삿갓의 일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선후기, 변할 것 같지 않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던 홍경래와 서북민들의 저항은 전혀 다른 곳에서 한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셈이다. 어쩌면 김삿갓은 홍경래가 바꾸고자 했던 백성들의 괴로운 삶 가운데 일부를 대신 살아 갔는지도 모르겠다.